죽이는 사랑 살리는 사랑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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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y 14, 2022

어리석은 농부가 논에 벼를 심고 매일 아침 바라보니 너무 늦게 자라는 듯 보였다. 그래서 벼 한 포기를 잡아 살짝 뽑아놓았더니 벼의 키가 한결 커진 것처럼 보였다. 농부는 하루 종일 일일이 모든 벼의 키를 조금씩 뽑아 키워 준 자신의 열심을 감탄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논에 나가 보니 벼들이 땅에서 뽑혀 말라죽어 있었다. ‘발묘조장’이란 한자성어의 유래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려고 힘쓰는 누에고치를 칼로 살짝 흠집을 내 주면, 쉽게 나오기는 하겠지만 날개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재대로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죽게 된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훈육과 망침을 구분하지 못해서도 안 된다. 자기 인기를 관리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해서도 안 된다. 양육과 사육은 비슷해 보여도 분명 다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칫 영적 독살을 하고도 얼마든지 사랑이라 착각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게 해 주는 값싼 위로는 사랑이 아니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고통을 잊으라고 마약을 진통제로 처방한다면 명의가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할 영적 훈련을 피하게 도와주는 것은 부모나 리더가 할 일이 아니다. 영혼을 가진 사람은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지식뿐만 아니라 희생과 헌신과 가슴앓이 등의 정서와 감정과 인격의 영역에서 훈련이 필요하다.

영적인 부모는 아프더라도 자녀들이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직시하게 도와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에 한 없이 작아지더라도 하나님의 크심을 바라보며 높으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녀에게 한없는 용기를 주고 자신의 가치를 높게 여기도록 기를 살려 주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공동체에 대한 희생 그리고 세상을 향한 헌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들었다면 자녀를 죽인 것이다.

고흐의 그림 중에 아빠가 반 무릎을 끊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기다리는 그림이 있다. 엄마의 손을 막 떠나 걷는 그 아이는 아빠의 품에 도달하기 전 분명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넘어질 때마다 안아준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사랑이 아니다. 반드시 겪어야 할 자녀의 실수와 실패를 부모들은 제거해줘서는 안 된다. 성경은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옳은 길 쪽으로 우매한 사람은 그릇된 길 쪽으로 치우친다.”(전10:2)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지 못하는 부모는 우매하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힘들어도 옳은 길을 걷게 한다.

생물학적인 부모는 정자나 난자만 제공하면 되지만, 신성한 부모가 되려면 신앙 안에서 용기가 필요하다. 명 연기자 알 파치노의 어머니는 그가 사춘기 때 밤늦게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소리 지르고 나가려고 욕을 해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다. 세월이 지나며 친구들은 대부분 총에 맞아 죽었으나 알 파치노는 뛰어난 연기자가 되었다. 자녀의 옳은 선택은 용기 있는 사랑 덕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맡았던 영적 자녀들과 우리도 평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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