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철학의 접시위에 올려놓는 법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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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anuary 23, 2022

“내 지갑 봤어?”와 “삶의 의미는 뭘까?”는 둘 다 정보를 구하는 질문이지만, 하나는 문제 해결이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깊이 있는 사고가 목적이다. 질문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문과 같아서 볼테르는 “사람의 깊이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그가 하는 질문을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자기 지식을 과시하거나 성찰이 부족한 자신의 신념에 동의를 유도하려고 답을 알면서도 하는 가장 멍청한 질문”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강한 목회자는 성도들의 삶을 철학적 질문 위에 올려놓는다. 깊은 질문들을 통해 양들의 영혼을 성숙하도록 운동시키지 않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질문이 있을까?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목표가 될 수 없고 의미 있는 삶을 살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다. 그러므로 세상이 세뇌하는 답도 없는 ‘행복 중독’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행복은 환경보다는 마음에 달려있다. 행복은 자동차의 계기판과 같다. 운전 중 계기판에만 집중하면 사고가 난다. 깊이 있는 질문들은 ‘자기애’에서 눈을 들어 마음의 눈으로 정면을 보게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도 결정한다. 그러므로 삶을 진지한 질문위에 올려놓아야 바르게 갈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갈증을 해결하려고 물을 마시는 행위를 동적인 쾌락, 물을 마신 후의 만족감을 정적인 쾌락으로 구분했다. 동적 쾌락은 종류만 다양해질 뿐 궁극적 쾌락이 아니다. 쾌락주의자들인 그들조차 고통을 피하고 쾌락만 추구하는 자들을 어리석게 보았다. 폐암의 고통이 흡연의 쾌락보다 더 크듯 어떤 쾌락은 오히려 미래의 고통이 된다. 반대로 운동의 고통은 미래의 쾌락을 보상하기 때문에 견뎌야 한다. 고통 없는 순수한 쾌락이나 쾌락 없는 순수한 고통은 드물다. 우정은 가장 강력한 쾌락인데 우정을 위한 투자보다 우정의 쾌락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가정교회 목장이 중요한 것이 거기에 있다. 내가 목장을 지키면 목장이 나를 지켜준다.

스토아학파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했다. 키케로는 궁수가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훌륭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시위를 놓고 나면 화살의 궤적이 더 이상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후회함 없이 해야 할 일을 다 한 후에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두는 것”이 지혜다. 그러므로 일어난 일을 감정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삶은 물질적 진화론적 사고로 살기에 너무나 철학적이다. 철학은 인간을 죽음 앞에 서게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죽음은 삶의 실패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죽음이 끝이 아닌 이유는 깊이 있는 질문위에 놓일 때 삶은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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