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냐 아픔이냐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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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anuary 17, 2021

리더로 섬기다 보면 본의 아니게 어려운 일들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자리에 놓여요.

복잡한 결정을 해야 할 부담을 피하고 싶어 주어진 규정대로만 따르다보면 냉랭해지죠.

가슴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영혼들을 여전히 사랑하려다 보면 어떻게든 도우려는 갈등이 생겨요.

이단적인 사상에 빠져있는 연로하신 목사님께 ‘회원제명 공문’을 보내야 할 상황이었어요.

목사회 임원들이 4차례에 걸친 신중한 토론 끝에 어쩔 수 없이 이단 정죄를 결정했거든요.

마지막 면접에서조차 시종일관 9개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정죄한 단체를 옹호하기만 하셨어요.

임원들 모두 그 목사님께서 나이도 많이 드셨고 이단 정죄를 받으시면 앞으로 힘드실테니,

인격적인 공격은 피하면서 옹호하는 단체가 이단임을 깨닫게 되시길 기대하는 마음이었죠.

배려하는 마음으로 공동체에서 축출한다는 ‘제명’대신 ‘회원자격 상실’로 표현도 바꾸고,

다른 교단의 입장을 아시도록 다양한 자료도 첨부해서 착잡한 마음으로 공문을 발송해 드렸어요.

예수님이시라면 이단에 빠진 사람을 만나 정죄해야만 하실 때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봤어요.

성경은 이단과 잘못된 사상을 용납하지 않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도 같은 입장이시죠.

하지만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살다 지옥에나 가라’고 분노하지는 않으셨겠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은 분노하시기보다 아파하셨을 거예요.

심장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분노인지 아픔인지를 점검해 보는 것으로 자신을 알 수 있어요.

요즘 미디어는 상대를 이해하도록 돕기보다는 반대편을 향해 맹렬한 분노를 쏟게 하죠.

사랑의 마음은 상대를 향한 분노를 곧 아파하고 고쳐주려는 안쓰러움으로 변화시켜요.

잘못을 대강 넘어가서는 안 되겠지만 분노로 일관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죠.

트럼프와 바이든, 방역수칙과 모임의 자유, 차별금지법 등 일방적으로 한쪽만 옳을 수는 없어요.

손을 맞잡고 고민하며 의논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이 오직 서로를 향한 분노만 남았죠.

명백하게 잘못된 분들을 대할 때조차 분노보다는 아픔으로 대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진리라는 이름으로 분노로만 충만하거나 상식이라는 논리로 영적인 선택을 오해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하거나 세상의 편에 서서 자기 인기만 관리하게 되요.

전쟁 속에서라도 분노보다는 아픔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단에 소속된 목사님에게 공문은 반드시 보내야 하지만 분노가 아닌 아픔으로 다가가고,

서로가 가짜뉴스라며 분노하는 상대방을 이해와 아픔으로 대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엇나가는 청소년들을 향해 행인들은 분노만 발산하지만 아버지는 심장으로 아파합니다.

‘분노 발산자’ 보다도 주님 마음으로 세상의 ‘아픔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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