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성화되지 않은 상처에 포로가 되지 않기(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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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September 13, 2020

역사적으로 ‘경험주의’는 많은 유익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고의 오류를 낳아왔어요. ‘경험주의의 포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진리를 무너뜨리는 위험성 때문이에요. ‘내가 경험했어!’라는 말처럼 강력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는 표현도 드물죠. 결코 경험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라 경험을 잘못된 결론으로 해석한 것이 문제에요. 그래서 개인의 경험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해석은 점검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꿈을 꾼 것은 사실이나 해석은 마음대로 하듯 경험도 마음대로 해석할 위험성이 있죠. 메뚜기 다리를 잘라 놓고 소리쳐도 뛰질 못하니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결론 내리면 곤란하죠.

삶의 경험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자면 아마 성공과 상처로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사람들은 보통 성공의 경험 보다는 상처의 경험에 포로가 되는 경향이 있어요. 상처의 경험이 성공의 경험보다 더 위험한 이유는 현재와 미래를 망치기 때문이에요. 상처가 된 경험은 자신의 실수와 결함을 용기 있게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잘못이 없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반사적으로 공격하게 만들어요. 과거 상처를 받았던 환경과 비슷한 경우에 처하게 되면 성급한 판단을 내려요. 권력의 압력을 받았던 상처는 건전한 권위까지 도전적인 자세로 공격하도록 만들고, 성희롱 피해에 대한 상처는 악의 없는 건전한 칭찬조차 곡해하기 쉽게 만들어요.

일단 상처의 포로가 되면 성급한 판단을 하게 되고 불편한 나머지 상황을 속단하게 되요. 과거 감정에 휩쓸려 원인 모를 복수심에 사로잡혀 루머와 폭로를 사명으로 생각하죠. 성급한 판단만큼 주변에는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겨나지만 양심에 거리낌도 없어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미안함은 씻어버리죠. 오늘의 무고한 사람에게 복수를 퍼부어 과거 자신의 상처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해요. 급기야 상대방의 잘못이 내 잘못 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부각시켜 일종의 면죄부를 얻어요. 이 면죄부가 너무나 매력적인 이유는 상대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해질 때까지는, 혹 완벽하더라도 나의 실수와 죄는 너무나 사소해 언제든 그 뒤에 숨길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식으로 상처는 자신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영적 성숙과 성장을 막아요.

영혼의 아픈 부위를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무심결에 아픈 부위를 스칠 때, 급격하게 분노하는 자신과 그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는 주변사람들이 생겨요. 몸이 불편하면 생활이 부자연스럽듯 영혼이 불편하면 관계가 부자연스럽게 되요. 더 이상 상처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 있게 과거를 바라보고 재평가해야 해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들춰내어 아프더라도 정리하고 해결을 해야 미래를 망치지 않아요. 성숙과 성화를 위해 아픈 상처를 반드시 하나님 앞에 다시 꺼내놓고 치료받으세요.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께서 상처를 매만지시고 치료하시고 성화되게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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