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더믹 시대에 성도의 삶이란 (20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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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ugust 1, 2020

코로나 팬더믹이 6개월을 넘어서자 관련 서적과 미래 예측이 수 없이 많이 쏟아져요.

코로나가 하나님의 심판이냐는 질문부터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버터는 녹이지만 진흙은 굳게 만드는 태양 자체에서 문제를 찾으려 하지 말고(C.S. 루이스)

코로나가 이대로 지속된다고 할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를 고민 하는게 중요해요.

종교개혁시기에도 흑사병, 초대교회 때는 천연두나 홍역으로 1/4의 인구가 줄었는데,

당시에는 하나님 탓이나 공격으로 해결되지 않을 재난에 대한 질문 자체 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밖으로는 ‘이웃사랑’의 삶을 돌아봤어요.

이방종교와 국가는 아픈 자들을 버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망 다니기 바쁠 때에

성도들은 자신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어요.

그 당시 기독교인들을 ‘파라볼라노이’(위험을 무릅쓰는 자들)라고 불렀는데,

간호하다가 병이 옮아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에요.

재난 앞에서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와 섬김의 도리에서 균형을 찾았어요.

한국의 초대교회도 민중들이 천연두와 콜레라를 굿이나 미신으로 쫓아 내려할 때,

교육을 통해 계몽했고 아픈 자들을 보살피고 치료하는 사랑의 본을 보였죠.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에 정보를 바르게 분석할 눈이 있다면 너무나 다행이지만,

AI덕에 의도적으로 곡해된 정보들만 선별되어 접하게 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해요.

색이 들어간 안경을 끼고 정보를 습득하면 렌즈를 잘 닦아도 진실을 알기 힘들죠.

재난 가운데 예배 권리만 주장하면 복음의 기회를 잃게 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하지만,

그러나 현장예배가 꼴통 보수도 아니고 온라인예배가 믿음 없는 타협도 아니에요.

편향된 기사들만 보고 성도들이 한 쪽을 정죄, 혐오, 반목, 오해하면 곤란해요.

잘 모르는 사건에 대해서 남이 해석한 정보로 세뇌되어 전달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에요.

생각의 게으름 덕택에 잘못된 정보를 생각 없이 퍼트리는 것 또한 언론전염이에요.

죽음 앞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영적인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대로 이웃을 섬겼어요.

자신의 생존문제만 염려하고, ‘Carpe Diem’ 체념적 쾌락주의로 산 세상과는 달랐죠.

우리가 섬기는 선교사님 두 가정은 안전한 한국 귀국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믿음을 증명하고 사람 앞에서는 냉철한 지성을 증명하고,

무엇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위해 아파할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부디 우리가 인간이 되게 하소서.’라는 세자르 차베스의 말처럼 사랑을 증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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