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랑이 어려운가?(20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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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uly 4, 2020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로 과거에 상처받은 경험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해요.

다시 사랑했다가 상처받을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죠.

용기 있게 사랑을 표현했는데 거부와 저항, 비난과 오해가 보상이라면 짜증이 나죠.

CS루이스는 “무엇이든 사랑하려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말해요.

무엇이든 사랑하려면 마음이 괴롭고 심하면 찢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상처 하나 없이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면 아무한테도 마음을 주지 마라.

동물한테 마음 한 조각도 허락하지 말고, 취미와 얄팍한 사치들로 고이 싸두라.

누구와도 얽히지 말고 그저 마음을 이기주의의 관에 넣고 꼭 잠가 두라.

안전하고 어둡고 아무 움직임도 없고 공기도 통하지 않는 관 안에서 마음은 편할 것이다.

상처를 입지는 않지만 부수고 뚫어서 바로잡을 수 없게 단단히 굳어 버린다.

사랑하는 것은 곧 (상처받을)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다.

신음하는 세상에 친절과 사랑을 베푼 대가는 대부분 냉소와 절망일 경우가 많죠.

사랑한 대가가 그렇기에 마음에 받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은 자존심을 건드려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는 자신의 권리 특권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초월적 사랑으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서예요.

자기 방어적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 속에서 하늘을 품은 사람들은 상처를 수용해요.

과거 로마에도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닥친 적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고발해서

사자의 먹이로, 검투사의 상대로 보냈던 로마에 충성하던 사람들이 병에 걸리자 보살폈어요.

버림받아 길거리에 내어 쫓긴 그들에게 자신의 집을 오픈했다가 병에 옮아 죽었어요.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빈민들과 병자들을 국가보다 더 잘 돌보았다고 평가해요.

미디어와 덩달아 교회를 비난만하는 성도들을 만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교회가 미디어몰이에 당해 실제 잘못보다 더 심한 조롱을 받는 것보다 더 아쉬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들의 착한 행실들’로 그런 비난들을 줄이지 못한다는 거예요.

비난받을 만한 일을 저지른 교회도 너무 안타깝지만 편 가르기를 떠나 당췌 누구 편인지,

사실 확인도 없고 신중하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미디어 흉내만 내고 삶의 섬김은 없으니,

하나님도 그가 성도인지 반기독교인 인지 무지하게 헷갈리시겠다는 생각이 들죠.

만약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나거나 체포되어 학살 된다면,

믿지 않는 시민들이 안타까워하며 울어주어야 할 텐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가 않죠.

성도는 교회가 칭찬 받을 때뿐만 아니라 욕을 먹을 때도 묵묵히 섬기는 사람이에요.

돈을 쓰고 후회할 용기, 시간을 내고 피곤할 용기, 상처받을 용기를 내 보세요.

신념과 믿음은 반드시 간직하되 그것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모가 상처받은 만큼 자녀가 사랑받은 것처럼 내가 상처받은 만큼 사랑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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