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미움의 온도 차 (20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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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rch 28, 2020

남과 님처럼 마음과 미움은 점 하나가 이동한 것뿐인데 온도차이가 확 달라지죠.

밥을 두 개의 공기에 담아 한 쪽은 ‘사랑해’ 다른 쪽은 ‘미워’라는 말을 했더니

한 달 후에 ‘사랑해’를 들은 밥은 하얗게 눈처럼 보기에도 좋은 곰팡이가 피었고,

‘미워’를 들은 밥은 시커멓고 우중충한 곰팡이가 피었다는 실험을 아실 거예요.

우리 입으로 나오는 말에 따라서 밥도 변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어요?

마음에 미움을 담지 않으려면 ‘사랑’과 ‘관용’이 삶에 깊이 뿌리내려야 해요.

같은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담긴 말과 정보만 담긴 말에는 차이가 있어요.

예를 들어 난산으로 아이를 낳다가 엄마가 돌아가신 아이가 있다고 해 보죠.

그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실에 대한 정보만 듣게 된다면,

‘너의 엄마는 너를 낳다가 죽었다.’는 고통스러운 표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죠.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죄책감과 지옥 같은 삶의 현실을 마주해야 하죠.

그런데 ‘엄마의 고귀한 희생으로 태어난 소중한 자녀야’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요?

아마 엄마 몫까지 열심히 그리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오늘을 살아갈 거예요.

절망을 줄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사랑’은 소망과 그리움으로 바꾸죠.

톨레랑스라고 하는 ‘관용’은 상대와 나 둘 중에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끝나는 상황에

상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뽑지 않으려 손을 붙들어 매는 행위라고 해요.

대화도중 상대를 제압할 충분한 무기를 보여주거나 알리려는 욕심을 이겨내지 않으면,

무심결에 상대를 공격하게 될 것이고 상대는 당연히 자연스레 방어할 수밖에 없어요.

딱딱한 주먹만으로 혹은 펼쳐진 보자기만으로는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져줄 수 없죠.

자녀가 내어 미는 손에 맞추어 져주려면 주먹과 보자기 둘 다 있어야 해요.

이렇게 져 주는 것을 관용이라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용의 상징이에요.

비난과 모독 속에 십자가에서 당당히 내려와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실 수 있었지만,

죽음으로 십자가는 받아들이시고 상상 못한 부활의 능력으로 깨닫게 하셨어요.

나에게 져 주시려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늘도 관용을 배우죠.

부모가 자녀에게 우유를 먹일 때 영양소 못지않게 반드시 온도체크를 하듯이,

옳고 그름 못지않게 사랑과 관용으로 말의 온도를 체크하는 것은 너무 중요해요.

분노로 마음이 들끓어 미움으로 변해 입으로 나오려 할 때 십자가로 다가가세요.

죽기까지 나를 참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질수록 사랑과 관용 시그널이 약해져요.

너무 멀어져 out of service 가 되면 미움에 사로잡혀 이기적이거나 공격적이 되죠.

영가족들이 남으로 보이지 않고 미움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사랑과 관용 잊지 마세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장 5절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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