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와 사랑의 균형이 가능할까요?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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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une 29, 2024

세상에는 반드시 공의가 필요합니다. 공의가 없으면 억울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율법이 없이는 사랑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공의만으로 소망이 있을까요? 공의는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공의는 형벌을 선고하지만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게 하지도 못합니다. 사회적인 약속대로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를 전적으로 원상복구 할 수 없습니다. 살인죄로 25년을 감옥에 있었다고 희생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공의이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CS 루이스는 참된 ‘용서’와 ‘양해’를 구분합니다. 용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분명 이런 일을 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진정한 태도를 받아들인다. 너에게 앙심을 품지 않을 것이고, 우리 사이는 모든 것이 이전처럼 같을 것이다.” 그에 반해 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어쩔 수 없었고 본심이 아니었구나. 누구라도 할 만한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 용서는 성장이 있지만 양해는 일종의 핑계가 됩니다. 내가 실수를 인정할 테니까 치사하게 굴지 좀 말고 그만 용서해 달라는 뻔뻔함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값싼 용서와 양해는 비슷한 결과를 얻습니다.

형벌과 양해라는 부작용에 빠지지 않고도 공의와 사랑의 균형이 가능할까요? 용서와 체벌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공의만으로는 결코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물론 핑계로 포장된 양해를 요구하는 사람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용서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양해를 요구하고 핑계만 대는 밉상을 용서하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공의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지만 용서 역시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사랑을 표현하는 용서를 선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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