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신앙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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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July 8, 2023

현대인들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처럼 자신을 위해 세운 우상이 있다.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 우상 중 최악이 ‘고집’이다. 고집이라는 우상이 악질인 이유는 ‘내가 원하면 곧 나의 권리’라 믿기 때문이다. 고집은 옳은 것, 정당한 것, 상식적인 것, 꼭 필요한 것, 마땅히 가져야 할 것, 권리 등으로 둔갑한다. 내 편리를 위해 남의 희생을 요구한다. 자신의 고집에 절하지 않는 상대에게 분노, 정죄, 모욕, 중상모략도 일삼는다. 이런 종류의 고집을 다른 말로 ‘압살롬 콤플렉스’라 한다. 아버지 다윗 왕 조차 반드시 제거해야 할 위선자로 만들어야 자신이 왕이 될 명분이 생긴다. 자기 포장의 끝판왕이다.

미주의 경우 팬더믹 기간 문을 닫은 한인교회가 1천 여 개다. 38% 이상의 목회자가 목회를 그만두려했다. 교회가 어려워지자 성도들은 목사 탓을, 목회자들은 성도들 탓을 했다. 서로의 단점을 “고집”이라고 평가했다. 고집과 신앙은 어떻게 다른가? 무엇에 대해 지속적으로 남 탓을 한다면 고집이다. 자신이 아닌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도 고집이다. 신앙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된다.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부분을 찾으면 본인의 희생과 헌신으로 그곳을 메꾼다. 고집은 자신의 불편을 채워줄 곳부터 찾는다. 견고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익함에 휩쓸린다 하여 ‘플로팅성도’라 한다. 가나안 성도(‘안 나가’ 반대)의 발전(‘진화’가 아님)된 형태다. 고집은 자신의 정체성을 놓치고 불행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고집불통들을 불러들이는 프로그램의 희생양이 된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단이라고 책망을 받았다. 자신의 고집으로 예수님의 무고한 죽으심을 막아드리려 했다. 의리 남 베드로의 마음도 몰라주고 사단이라 부르시다니 예수님께서도 참 너무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고집스런 베드로를 반석 같은 신앙인으로 바꾸셨다. 그런 면에서 고집과 신앙은 비슷하다. 그러나 신앙과 고집은 다른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고집을 부리며 자기만의 방법을 사용하면 수많은 이스마엘만 태어난다. 그 대가는 13년의 낭비다. 고집은 영적 여정에 지체를 주고 인생을 낭비한다.

한 목회자가 안타까운 마음에 성도에게 질문했다. “오늘 죽는다면 가장 후회할 것이 무엇인가?” 삶을 돌이켜 회개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 성도는 더더욱 쾌락과 향락에 빠졌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죄악의 짜릿함을 누리지 못할테니 더 누려보리라 생각한 것이다.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 올바른 질문은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한 나라에서도 영원히 산다면 괜찮은가?”다. 오늘 사는 그 모습으로 영원을 살아야 한다고 할 때 과연 그래도 괜찮은가? 고집불통 신앙인이 아니라 신앙의 고집을 장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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