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님을 위한 기도시간(2025.12.07)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모교회를 섬기던 한 목사님이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떠나셨습니다. 몇년의 시간이...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기쁜’이란 것에만 치중 하면 ‘잘못된 소식(정보)’을 복음으로 착각한다. 자칫 죄를 격려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한 설교자가 장미 한 송이를 회중들에게 전달하면서 냄새를 맡아 보라고 했다. 냄새를 맡은 후 옆 사람에게 전달하는 동안 설교자는 성의 고귀함과 부부 안에서의 독점력에 대해 설교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중의 손에 들려진 장미를 단상 앞으로 가져오게 했다. 회중들이 조심스레 다루긴 했지만 마지막 회중의 손에 들려진 장미꽃의 잎은 생기를 잃었다. 설교자는 그 장미를 들어 보이며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친 성은 이런 모습이라며 “이런 장미를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우리도 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설교를 마쳤다. 회중들 가운데는 매춘업에 종사한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죄감으로 예배에 다시 참석하기가 두려웠다. 또 다른 곳에서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설교되었다.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 중이던 여인을 붙잡았다. 돌로 즉결 심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으려고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죄 있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여인을 구원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정죄할 수 없다고 설교를 마쳤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들은 회중들은 청년들이 많았다.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까? 두 설교는 각각 의도와는 달리 정죄에서 멈추거나 성적인 죄에 대한 격려로 받아들여졌다. 회중에 따라 설교내용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성경이 밝힌 성경의 목적 4가지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훈련은 본질적으로 기쁠 수 없다. 훈련이 가져다주는 열매가 기쁜 것이다. 싸구려 기쁨은 마약이나 쾌락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중독자가 생기는 것이다. 복음은 중독에서 회복을 주는 것이다.
복음은 정죄에서 끝나서도 안 되지만 죄를 권장하고 용납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은혜의 복음을 전하면서 죄를 권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순히 상대를 기쁘게 하기 보다는 경고와 회복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지만, 너무 사랑하시기에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놔두시지는 못하신다.”는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알려야 한다. 한 쪽만 강조하고 치우치면 죄를 권장하거나 정죄에서만 끝이 난다. 이것이 복음의 양면성이다. 그런데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자로서의 태도와 자세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복음이 정죄와 죄의 격려가 아닌 경고와 회복으로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