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걸어야 할 그 길 (20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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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October 2, 2022

신학에서 설명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삼위일체다. 이단적 설명으로 빠지기 쉬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는 이상한 식으로 설명한다. 아버지가 남편이자 교수라고 설명하면(혹은 물, 얼음, 수증기) ‘양태론’의 이단이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세 분이라 한다면 ‘삼신론’이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영혼으로 받아들여지는 신비한 신학이다. 그런데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한 책이 유진 피터슨의 “그 길을 걸으라.”이다. 피해야 할 길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를 소개하고 있다.

바리새파는 세속적인 유혹에 전혀 타협하지 않고 피를 흘려가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켰다. 전통을 고수하고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았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자신을 훈련했던 그 도구로 남을 평가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의 깊이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과 상대비교를 통해 측정한다. 상대적 우월감은 곧 상대에 대한 비판과 정죄를 낳는다.

사두개파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영적인 것들을 과감히 포기한다.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았기에 이 세상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되었다. 종교적 활동은 진심보다 형식이었고,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서 산헤드린을 접수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세속적인 삶 가운데 그들의 영혼은 메말랐다.

에세네파는 바리새인과 비슷했다. 다만 남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과 구별됨에서 해답을 찾았다.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나갔다. 실망을 준 교회와 세상을 떠났다. 홀로 광야에서 영성을 다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와 신약의 첫 책 마태복음 중간 약 400년 동안 이렇게 3가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마치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과 같다. 이 표현은 다스리는 실제 왕이 없었다는 의미 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던 사람들에게 참된 왕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자신이 걷던 길을 버리고 그 왕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도록 길을 보여주셨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다.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길 주변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의 길이 나란히 놓여있다. 그런 길로 들어서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걷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분리주의, 세속주의, 염세주의를 벗어나 주님의 길을 걷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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