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드러나시는 삶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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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ugust 6, 2022

기독교는 믿을 준비를 해야만 비로소 받아들이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식의 접근이 율법주의다. 믿음이 먼저고 삶의 변화는 그 이후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훈련한다. 거룩해지려고 절제할 필요는 없지만, 거룩하다 인정을 받았기에 절제가 가능하다. 다만 여기에도 함정은 존재한다. 믿는다면서 변화 없던 이전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신앙의 질은 참된 보물을 발견했느냐로 결정된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저렴한 가격에 사라고 한다면(혹은 땅 값이 오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면)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밭을 구매한다. 주일 성수 안에 포함된 영원한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이 율법이 아니라 기쁨이다. 밭에 숨겨진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밭을 구매하는 과정과 파내는 과정은 귀찮은 일이 아니다. 주일 성수와 신앙생활이 부담스럽지 않으려면 그 가치를 알아야 한다. 밭을 구매하기 위해 정리해야 할 재산이 부담되는 사람은 그 안의 보물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진리다. 사람의 행동을 보고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행동과 삶은 단지 그 사람이 발견한 보물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은 더 소중한 것을 위해 그렇지 않은 것을 포기할 수 있다. 엘리엇은 영원한 것을 위해 그렇지 않을 것을 포기하는 자는 바보가 아니라고 하였다. 영원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 성도들은 다소 바보로 보인다. 성도의 삶은 인생의 목적, 예수님의 가치, 섬기는 교회, 예배, 헌신의 소중함을 드러낸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그것들을 지키는 이유는 유치하게 신에게 잘 보여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의 계약(?)을 따내기 위함이 아니다. 삶의 방식과 선택을 통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이다. 성도는 믿는 대로 선택하고 믿는 것을 실천한다. 성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은 율법적 행위를 하는 것이나 혹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감정적 상태가 아니다. 마음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 사랑만으로 가득한 사람도 충분히 칭찬을 받기 위해서 율법적으로 경건함을 추구할 수 있다. 겸손함이 몸에 밴 성품이 아니라 그 대가가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에 겸손을 연습하며 겸손한 척 할 수도 있다. 또한 자기애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셔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감정적 상태에서 불안한 확신을 갖는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환상이나 기적이나 천사들을 통한 외부적인 증거나 꿈에 신앙을 닻을 내린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성품이 예수님을 너무나 닮아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성품의 열매들(은사가 아님)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성도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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