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님을 위한 기도시간(2025.12.07)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모교회를 섬기던 한 목사님이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떠나셨습니다. 몇년의 시간이...
최근 자기개발 강의들은 행동보다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하나님께서도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책망하셨죠. 마음 없는 행동은 가능하지만 행동 없는 마음은 어떨까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과연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긴 할까요? 마음과 행동을 분리하면, 행동이 없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기보다는 자동적으로 의도와 마음은 좋았다고 가정해요. 선한 행동만 없었을 뿐 마음은 선했다고 가정하죠. 외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지 마음은 순수했다는 거예요.
성경은 “마음은 좋은데 행동이 없는 경우”를 아예 다루지 않아요. 도리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셨죠. 행동이 없는 경우는 책망할 수도 없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실 때 삶의 열매를 보세요. 행동보다 마음을 강조하려면 행동 자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전제조건이죠. 우리는 종종 마음먹은 것이 자신인줄 착각해요. 의롭게 생각할 줄 알면 의인인 줄로 여기죠. 사람의 눈도 속이지 못할 행동으로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어요. 성경은 마음에 가득한 것이 행동으로 나올 수는 있어도 마음에만 있고 행동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요. 마음 없이 체면치례나 외식은 가능해도 행동 없는 마음은 불가능해요. 성경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최소한의 태도를 보고 그의 동기를 평가해요. 그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해결책으로 “처음 행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세요.
빙산은 보이지 않는 부분과 보이는 부분으로 구성되죠. 90% 이상을 차지하는 보이지 않는 부분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죠. 10%의 외부로 드러난 부분은 정체성에 따라 내가 하는 일이에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처럼 10%의 물 위로 드러나는 부분은 그 아래 90%의 생각을 드러내죠. 10%가 드러나지 않는 빙산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신앙이라지만 보이게 되어 있어요. 진실한 고백은 인정해야 하지만 반드시 점검이 필요하죠. 은행원이 고객의 말만 믿고 몰기지를 승인하지 않아요. 증명할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죠. 서류 제출을 면제해 주고 승인할 수 없듯이 신앙도 삶의 열매나 태도로 확인이 되요. 자신의 양심을 잘 살펴보는 방법은 자신의 행동을 보는 것이죠.
최근 존경하는 목사님들과 교제하면서 동일하게 들은 말이 있어요. 코로나는 우리의 신앙의 민낯을 드러낸다는 거죠. 평소 튼튼한 반석 위(반석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에요)에 지어진 집 같아 보였지만 코로나로 주변을 흔들어봤더니 모래 위였고, 비가 나고 바람이 불고 물이 흘러가니 단단하지 않았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는 거예요. 한 때 열심히 하던 거품으로 좋은 신앙이라 평가를 받았었지만, 코로나로 잠잠히 주님 앞에 서야 할 기회가 되자 여지없이 거품이 걷히고 밑바닥이 드러났다는 거예요. 코로나가 적당한 핑계가 되는 사람이 있고,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는 신앙의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알곡인가 가라지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마음이 뜨끔하며 회개하는 사람은 도리어 알곡이이지만, 당연히 알곡이라고 ‘근자감’을 갖거나 혹은 겁주는 질문으로 함부로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며 불평을 하면 이미 가라지라고 했던 한국교회의 어르신의 설교가 새삼 뇌리에 스쳐요. 주님의 신부는 마음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아요. 짧은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갈 때 후회보다는 추억을 더 많이 가지고 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