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벗이 될 기회 (20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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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rch 19, 2022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벗)”로 3번 소개된다.(대하20:7, 사41:8, 약2:23) 돈이나 인맥이나 유리한 것들을 얻으려고 접근하면 진정한 친구가 되기 어렵다. 서로를 향한 진실함과 헌신이 진정한 친구를 만들 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진실함과 헌신이 필요하다. 친구 됨의 가장 큰 적은 ‘자기중심’이다. 아브라함은 자기만을 위해 우정을 쌓지 않았다. 자기만족을 위해 재단을 쌓거나 예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좋아서 그분의 음성을 경청했고, 하나님이 좋아서 재단을 쌓았고, 하나님이 좋아서 순종했다. 자기 기분이나 상황이나 편리함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지 않았다. 이용하면서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목사들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려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최상의 것에서 벗어나 값싼 삶으로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엄숙한 경고 앞에 서 있다. 말씀으로 수술해야 할 상황에 단지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현실을 잊도록 마약이나 환각제 처방을 하면 그 죄의 대가는 고스란히 리더의 몫이다. 교회는 병원과 같아서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곳이어야 한다. 만약 분별력을 잃게 하고 질병을 악화 시키는 의사가 있다면 좋은 의사가 아니다. 친구와 부모도 마찬가지다. 성숙하도록 돕지 못한다면 진정한 친구와 부모가 아니다.

행복이 우상인 된 현대인에게 순종과 섬김 등의 기독교적 가치를 가르치는 일은 힘겹다. 당장 손해 같아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섬기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이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행복(소위 팔복)이라고 한다. 과연 팔복 중 하나라도 행복이라 여기는가?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기 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복음이 인생의 주도권을 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성공하게 해줄 것이라 약속할 때에야 교회에 나온다. 예수님 없이도 아쉬울 것 없으니 신앙은 그저 선택이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던 청년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니 어떻게 얻었는데 말이다. 그것이 부담된 청년은 그 뒤 말씀을 놓쳤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베드로 못지않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약속을 받았으나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쯤 하나님 나라에서 그 가치를 놓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벗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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