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곳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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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rch 12, 2022

“전 신앙이 너무 약한데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현재 신앙의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이다. 아무리 약한 신앙이라도 주님만 바라보면 성장한다. 지속적인 시선이 결과를 낳는다. 같은 위치에 있는 있다 하더라도 위를 바라보는 사람과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의 결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든 언제든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결정한 사람의 시선의 끝을 그의 운명으로 인정하신다. 역시나 단 한 번의 작은 한눈 팔기일지라도 아파하시는 이유는 그 끝이 멸망이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자리보다 바라보는 시선의 끝이 그 사람의 영성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완전할 수 없는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온전하게 된다.

시선을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 두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자신의 뜻을 갈망한다. 자신의 소원과 뜻을 곧 하나님의 뜻이라 고민 없이 받아들인다.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에 비해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은 작아진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예수님의 제자는 아닌 아이러니가 생긴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분 짖는 것은 시선이었다. 마음에 덮인 기름을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보다 자기 기준이 중요해진다. 아벨이 바라보았던 그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도 아벨과 같이 온전해진다.

가정교회 목장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의 장소다. 모두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곳이다. 세상이 아닌 성경과 예수님께서 기준이 되신다. 시선을 돌이켜 푯대에서 벗어나 침륜에 빠진 사람들이 신앙의 강등권에서 탈출하는 장소다. 근심과 염려를 소망과 헌신으로 바꾼다. 통장 잔고(돈)가 아닌 예수님에게서 안정감을 찾는다. 시선을 하나님께 돌이킬 때 커다란 문제도 작아진다. 그런데 이런 시선의 돌이킴이 쉽지 않다. 고집이 있기 때문이다. 손바닥 뒤집듯 바른 시선에서 눈을 떼는 것은 너무나 쉬운데 주님께 고정하기는 쉽지 않다. 목장에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시선을 주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갈 힘이 다시 생긴다.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얕은 신앙은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고 속이기까지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물 위를 걷다가 풍랑으로 시선이 쉽게 옮겨져서 그만 물에 빠졌다. 서쪽을 향해 운전을 하면서 백미러로 뒤쪽을 힐끗 확인했다고 해서 동쪽에 시선을 둔 것이 아니다. 시선과 몸의 방향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님께 머물도록 작은 습관도 주님을 바라보도록 조율하자. 그것만이 짧은 인생을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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