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섬김은 가능한가? (20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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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February 20, 2022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혹은 강의 중 ‘순수한 마음으로만 섬겨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다. 의도가 있는 섬김은 주고받는 모두에게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섬김에 대한 통계자료는 다르게 말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의도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을 비교해 보니 섬김의 양과 질에서 의도가 있는 사람이 더욱 섬겼다는 것이다. 비록 순수성에 의심이 생길 ‘뇌물성’의 섬김조차도 순수한 섬김을 강조하는 사람보다 마음이 연결되고 진실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과연 순수하게 섬기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라는 질문도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선한 생각보다는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 때문에 순수한 섬김은 가뭄에 콩이 나듯 어렵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아예 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섬기고 싶지 않은 마음을 따른 것이 정직하다고 착각한다. 순수하게 섬겨야 한다는 마음은 곧 순수한 마음이 들 때만 섬기겠다는 자세로 변질이 되고 곧 섬김을 삶에서 밀어내어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들이 사랑스럽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때만 젖을 물리고 밥을 차려 줬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자녀는 하나도 없다. 숭고한 의무감 덕분에 우리 모두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복음을 믿고 교회에 다니도록 도우려는 ‘전도 목적의 섬김’이 순수하지 않을까? 차라리 전도의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김치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전도의 목적이 없이 다른 순수한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이 순수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뜯어보면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자기 의”를 “전도”보다 앞세웠을 뿐이다. 과연 전도의 목적 없이 삶의 습관 자체가 순수한 섬김만으로 몸에 베인 사람이 있을까?

영혼을 섬기는 이유는 자신의 영적 성숙과 더불어 비신자를 구원하여 제자 삼기 위함이다. 이보다 더 숭고한 섬김이 어디 있을까? 육체적으로 잘 ‘사육’해 놓고 영혼은 지옥에 보내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라 엄청난 뒤통수다. 밴쿠버 예닮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아무런 목적과 의도가 없다는 것이 순수함일까? 물론 섬기는 이유가 우리 교회를 수적으로 불리려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만난 분들에게 세상을 살면서 가장 좋은 기회였다고 하나님께도 당사자에게도 인정받고 싶다. 삶의 변화를 위한 기점이 되어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돕기를 원한다. 인간관계를 평가하실 예수님 앞에서 보내주신 영혼들을 적당히 위로만 하고 비위만 맞추다 겨우 구원받은 사람들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다. 천국은 가서 기쁜데 삶을 돌아보며 아쉬움이 남는다면 리더로서 잘 인도한 것이 아니다. 다른 리더가 아닌 나를 만나서 천만다행이었고 행복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 순수하지 못한 의도일까?

남을 섬기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감 이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나 존재감이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순수하지 못한 섬김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숭고한 섬김은 나를 통해 복음을 믿고 제자가 되도록 섬기는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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