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요구들이 부담스러운 때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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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y 18, 2019

하나님의 요구들이 부담스러운 때

 

믿지 않는 분이나 믿음이 정체(?)된 분들이 십계명에 대해 질문을 할 때가 있어요.

십계명 중에 ‘대인 계명’이라 부르는 5-10계명은 누가 보더라도 보편적인 윤리이니,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지키는 것이 당연하지만,

‘대신 계명’이라 부르는 1-4 계명에 대해서는 반감이 생긴다는 거예요.

 

1-4 계명은 지성적인 접근과 감성적인 접근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지성적 접근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니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설명이죠.

마치 어떤 프로그램이 실행이 되려면 명령의 순서를 따라야 하듯이,

1-4계명을 따라야 5-10계명의 실행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에요.

오늘날 대인 계명의 명령대로 실행하기를 거부하거나 자꾸 오류가 뜨는 이유는

창조주의 1-4계명의 명령어를 삭제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와 달리 감성적인 접근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요.

다소 부당해 보이는 1-4계명의 요구는 반드시 하나의 전제가 있는데,

나를 창조하시고 명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전제에요.

관심도 없다면 죄를 짓던 우상 숭배를 하던, 욕을 하던, 생일잔치에 오지 않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내가 그의 사랑하시는 존재이기에, 그분의 관심이 나에게 있다는 전제가 있기에,

내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갖고, 우상을 숭배하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때,

성격이 깔끔(?)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그것이 서운함과 아픔이 되는 거예요.

마치 사랑이 없는 존재에게는 굳이 질투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죠.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의구심과 반감을 갖는 이유는 세상의 법 집행 방법 때문이죠.

법은 좋지만 그 법을 위해 ‘걸리기만 해 봐라.’하는 식으로 경찰을 배치하고,

어쩌면 걸려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단속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실망이죠.

물론 사람들도 법을 지키려 하기 보단 안 걸리려고 노력하는 문제도 있어요.

 

정상적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걸려들 함정을 파지 않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나를 향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계명에 대한 부담들도 주시지 않죠.

다행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부담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킬 힘도 주세요.

단속 경찰처럼 ‘걸리기만 해 봐라.’ 하는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손 내밀어 잡아주시고 도와주려는 예수님의 따스함을,

나를 향한 계명들을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복된 예닮인들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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